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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불사신에 꽂혀서 적은 글

어중간한 인간 2025-11-24 20:18:47 단편집.8 어두운 동굴 안, 붉은 피의 냄새가 내 코를 찔러왔다. 내 앞에는 머리에 대검이 꽂혀 힘도 못 쓰고 있는 블랙 드래곤이 보였다. 사실 내가 저렇게 만들긴 했다. 용병일을 하는 몸이니 의뢰로 걸린 블랙 드래곤을 잡고 있었을 뿐이다. 【나를 죽여도 아이들만큼은... 제발...】 블랙 드래곤이 뭐라고 울부짖지만 내게는 그저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정말 개 같다. "어이 용가리. 냄새나는 입 닫아." 그제서야 드래곤은 입을 닫고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다. 난 저 드래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린다. 그리고 저 드래곤은 곧 죽는다. 머리에 대검을 꽂아서 뇌를 반쯤 찢어놨으니 안 죽는 게 신기한 거다. 나는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이 용가리. 불." 드래곤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마법으로 불을 붙여주었다. 나는 입안 연기를 뱉으며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곧 죽는 생명들의 꺼져가는 눈동자, 용병일이라 살려 줄 수도 없는 게 좀 그렇다. 시가를 입에서 떼며 크게 한숨을 쉬며 드래곤의 머리에 박힌 대검을 잡았다. "솔직히 네가 뭐라고 크랑크롱크르릉 거리는지 잘 모르거든? 그러니까. 조용히 가자." 【나를 죽여도 아이들만큼은... 제발... 부탁하마...】 아까도 말했지만 다 들린다. 못 듣는 척하는 것도 주옥같고 개 짜증 난다. '왜 계속 말 걸고 지랄이야... 죄책감 들게...' 나는 대검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동굴 깊이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세 마리의 작은 블랙 드래곤들을 바라보았다.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려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꿔서 저 죽어가는 드래곤의 목소리로 흉내 냈다. 【아이야... 어미는 조금 멀리 떠날 거란다... 잘 크거라...】 라고 말하고 나서 어린 드래곤들의 눈을 마법으로 가려놓고 다시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고맙네... 용병...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텐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대로 드래곤의 머리를 반토막 냈다. 붉은 피가 내 온몸에 튀며 썩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났다. 다시 시가를 입에 물고 드래곤의 시체를 아공간에 한 번에 담으며 어린 드래곤들을 한 번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나는 혀를 차며 동굴을 빠져나왔다. "후...." 무언가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만 딱히 내키지는 않는 건 사실이다. 이런 의뢰를 마치면 술과 시가가 당긴다. 돈은 많이 받지만 돈을 대가로 생명을 취하는 게 영 좋은 건 아닌 것 같달까. 시가를 피우며 마을로 돌아간다. 내 소개를 간단하게 한다면 현재 나이는 9조 30억 4천만 321살, 셀 수 없는 불로불사의 존재이다. 현재는 용의 시대라고 내가 칭하는 시대로서 946번째 시대이다. 이 기나긴 나날을 지내다 보니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여튼 마을로 돌아오니 이 시대가 오고 30년 뒤부터 내게 싸움을 거는 남자가 내 앞을 막았다. 저 남자가 나타난지 거의 1년이 넘어간다. '뭐... 또 이렇게 말하겠지.. 나랑 싸우자 용병 여자라고... 에휴.' 그 남자는 어제와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하며 내 앞을 막았다. "나랑 싸우자 용병 여자!!" '아 느낌표 두 번 뺐네...' 시가를 입에서 떼며 바닥에 던져 밟았다. 입에 머금고 있던 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싫다. 넌 약하지 않느냐." "뭐가 약해! 이길 수 있거든!!" 저 꼬맹이가 참 싸가지가 하나도 없다. 어른에 대한 공경은 하나도 없고 늙은이를 이기겠다고 저렇게 덤비는 꼴이라니 웃긴다. 참고로 난 나이를 알리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내 신체 나이는 25살에 멈춰 있다. 신체 나이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딱 25살에 고정되어서 살아왔다. 그러니까 저런 꼬맹이가 날 이기려 하는 것이다. 자존심 따위 때문에 날 이기려고 하는 어린 놈의 새끼, 웃기는 꼴이다. 꼬맹이는 검을 뽑고 검 끝을 내게 겨누었다. 인상을 잔뜩 구기며 진지한 말투로 크게 소리쳤다. "덤벼라!!! 이번에야말로 너를 이겨서 넘어서주마!!" "하..." 저 꼬맹이는 앞뒤가 없는 것인지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 주변 인파가 몰리게 되는데 알고 저러는지 참 모르겠다. 이러면 싸움을 안 받아주기도 애매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등에 매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고 크게 한 번 휘둘렀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며 흙먼지가 휘날렸다. "귀찮게시리... 와라... 꼬맹아." "누구 보고 꼬맹이래!!!" 폭발적인 속도로 내게 돌격해오는 꼬맹이를 한 발자국 움직여 피하고 대검을 꼬맹이가 돌진하는 방향을 예측해 꽂아 놓았다. 쾅! 앞뒤 안 가리고 돌격하던 그는 내 대검에 얼굴을 세게 박으며 기절했다. "이걸로 365전 365승인가...?" 기절해서 말도 못 하는 꼬맹이를 발로 한 번 차고 숙소로 돌아갔다. 붉은 피가 굳어 갈색으로 물든 셔츠를 벗으며 앞머리를 올려 넘겼다. 그리고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시가를 피우든 담배를 피우든 술을 마시든 건강이 나빠지지 않는 이 몸은 내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는다. 사람은 아프기도 하고 병원도 가보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다. '이번 시대는 좀 구려서 병원이 없긴 하지만...' 힐을 해주는 힐러들이 있긴 한데 난 상처도 재생되니까 내게는 필요 없는 존재들이다. 모든 옷을 탈의하고 작은 욕조에 몸을 담그며 연기를 내뱉었다. "죽고 싶네...." 예전 내 동료들의 이름도 기억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못해도 10조 년은 살았는데 기억하는 게 말이 안 되긴 한다. 나는 욕조 안에서 시가를 태우며 실실 웃었다. 기쁨의 웃음은 아니며 그렇다고 슬픔의 웃음도 아니다. 쓸쓸하다. 이곳에서 날 기억해주는 사람은 또 몇십만 년이 지나면 다 사라지겠지. 그리고 난 다시 인간관계를 쌓아나가야 할 것이고 생각할수록 우울하고 짜증 난다. 히키코모리 마냥 집밖에 나가지 말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내 성격상 죽어도 안 된다. 욕조에서 나오며 내 금빛 머리카락을 걸레 짜듯 쥐어짠다. 이렇게 해도 머리카락 한 올 빠지지 않는다. '지랄이다... 흐흐' 이런 말도 안 되는 몸을 거울로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 들지 않는 신체, 손상도 되지 않는 여러 기능들을 보고 있자니 왜 내가 처음으로 불로불사가 되었을 때 책에서 봤던 왕들이 이 능력을 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좋은 몸이긴 하지... 씨발..." 바람 마법의 힘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순식간에 말리고, 깔끔하게 하나로 묶어 올렸다. "생긴 건 예쁘게 생겼네. 하하" 잠시 자존감을 키워보려고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며 칭찬했다. 그래도 딱히 즐겁거나 기쁘지 않았다.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감정들이 무감각해져 가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안 죽어서 기뻐하던 시절은 이런 몸이 되고 4년 동안뿐이다. 죽고 싶어도 못 죽으니까. "하하... 하하... 씨발...." 매번 거울을 보면 구역질 날 것 같고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 존재하면 안 되는 존재이며 세상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부서트리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 내가 느끼는 난 그런 존재이다. "사라져야 하는 존재... 핳하하... 오래 살아서 뭐할까...?" 나는 혼잣말하며 거울 앞에서 실성한 채 계속 웃었다. 그때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고 나는 욕실에서 나와 바지를 입고 새 셔츠를 대충 걸쳐 입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그때 기절시켰던 꼬맹이가 서 있었다. 매번 봐도 신기한 건 키가 어떻게 저렇게 클까 싶다. 내 키는 죽어도 클 생각은 안 한 채 멈춰 있다. '영원한 150cm... 젠장... 저 꼬맹이는 몇 살인데 저렇게 큰 거야?' 꼬맹이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꼬맹이는 날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다시 싸워주세...." "닥쳐." 문을 쾅 닫은 다음, 미처 입지 못한 속옷을 걸치고 셔츠 단추를 잠갔다. 저 꼬맹이는 싸움광이 아닐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반나체인데... 신경도 안 쓰냐고...' 침대에 눕고 천장을 바라보며 천장에 구멍이 몇 개가 있는지 세본다. '저번에 39개까지 셌던가..?' 다시 구멍의 개수를 세고 있는데— 쾅!!!!! 나는 큰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내 방문을 어정쩡하게 잡고 있는 꼬맹이가 보였다. '지랄....' 저 미친놈은 숙녀의 방에도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변태였다는 걸 깨달으며 대검을 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꼬맹이는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치며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용병 씨... 그게 아니라!! 실수라고요!!!!" "어. 잘 알겠어. 넌 변태다." 눈에 불을 켜고 대검을 번쩍 들어 올렸고 꼬맹이는 도망을— 도망을 치지 않고 오히려 내 다리 쪽으로 돌격해 태클을 걸어 넘어트렸다. 나는 분노에 얼굴을 구기며 대검으로 꼬맹이의 삶을 마무리 지어주려는데 의외의 말을 꼬맹이가 꺼냈다. "그.... 좋아해요!!" "뭐...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갑자기 고백을 박는다니 살고 싶긴 한가보다. 날 당황시켜서 죽이는 걸 망설이게 하려고 한 거면 완벽하게 성공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완벽한 작전이었다. 그치만 이런 거짓말에 속을 내가... 내가... 아닐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은 떨어트리고 눈동자는 흔들거리며 멈출 줄 몰랐다. 고백이라니 사실 몇 억 년 전 이후 오랜만에 받는 고백인데 왜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아니 아니!! 이건 구라잖아. 딱 봐도!! 정신 차려 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꼬맹이를 노려보는데 그는 내 배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머릿속이 멍해지지만 일단 떨어져 보려고 힘을 주어보지만 어째선지 힘이 안 들어갔다. 오히려 몸에 힘이 빠지며 그냥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뭔가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꼬맹이를 보는데 꼬맹이와 눈이 맞주쳤다. "놔라." "넵...." 꼬맹이는 무릎을 꿇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용병..." "잠깐.... 올리비아. 용병이 아니라 올리비아라고." 꼬맹이는 잠시 벙찐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빠르게 숙였다. "오... 오... 올리비아님... 그게 아까 한 말은요..." "거짓말이라고? 알아. 누가 나 같은 걸..." "진심이었어요!!!" 이번에는 내가 벙졌다. '구라가 아니었다고? 진심이었다는... 뭐라고??' 머리가 굳은 듯이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갔다. 나는 꼬맹이를 고개만 돌려 쳐다보지 않으며 작게 말했다. "....앞뒤 없는 놈." "네?" 그렇게 나와 꼬맹이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나의 끝나지 않는 긴 세월의 변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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